그림에 귀걸이를 단다. <평면과 입체의 만남>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평면의 그림 위에 물건이 올려진다. <작가와의 만남>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세기적 만남이다. 귀걸이 디자이너와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이 대화를 한다. 귀걸이 디자이너는 마리 로랑생에게 작품을 선물한다. 이런 언급은 또 다른 대화의 장을 허락한다. 

그림 속 주인공은 귀걸이를 선물받고 만족한 표정이다. 눈을 아래로 깔고 뽐내고 있다. 파스텔톤의 어울림, 다정한 대화이다. 머리에 꽃을 달았지만 왠지 허전한 그녀에게 어울리는 제안이다. 작품은 그렇다.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관건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만난다. 끌림의 진원지를 찾아서...


귀걸이 작가는 고심한다. 주인이 없는 구상은 공허하다. 막연하다. 억지로 끼워맞춘 것같다. 선택과 집중, 컨셉은 중요하다. 임자 없는 작품은 길 잃은 양이다. 생명력을 잃은 무개념이자 가치의 상실이다. 목표를 규정하고 목적지를 향해가는 것이야말로 회귀이다. 귀걸이 작품은 협업의 소산이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조합이 이뤄낸 걸작이다. 단단한 원형이 중심을 잡고, 깃털은 꼬리를 친다. 여자의 마음, 갈대와 같다, 살곁에 닿는 순간 스스로 잠이 온다. 둘이 하나임을 알리는 순간, 아름다운 모습은 그녀에게 소곤거린다. 창작은 의지의 표명이자 자유로운 해석의 계기가 된다. 시대를 뛰어 넣는 소통의 제안은 작은 귀걸이 하나로부터 이어진다. 

마리 로랑생에게 귀걸이를 선물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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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있는 일상, 낭만적이다. 잦은 귀차니즘은 건조한 일상을 만든다. 큰맘먹고 아내와 예술의 전당의 전시 데이트를 나선다. 우리만 모르던 프랑스의 유명작가'라는 정보가 한몫을 한다. 마리 로랑생의 삶이 전시에 녹아 있다. 전시장으로 입장하기 전, 전시장 못지 않은 벽면 디자인도 눈에 띤다. 벽면 대형 프린트와 다양한 아트용품들도 작가 못지 않은 기교를 부리고 있다. 세상의 변화 속에 작품의 흐름이 읽혀진다. 작가의 삶이 도표처럼 펼쳐진다.


그래, 까놓고 이야기하자. 전시내용보다 디자이너 때문에 전시장에 간 거라고. 조남이 대표를 안다. 마리 로랑생전을 준비한 <남이 디자인>의 대표이다. 전시장에서 두번 놀란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에 놀라고, 전체를 디자인한 조남이 대표의 안목에 놀란다. 그녀는 내가 알던 그녀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더라. 디자이너의 흔적이 곳곳에서 돋보인다. 엽서나 노트 등 다양한 아트상품들이 그렇다. 마리 로랑생은 작가가 되기에 충분히 척박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고뇌하는 삶이 곳곳에서 묻어나고 그의 삶이 작가적 삶이란 걸 전시는 보여준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죽음과 사랑 등 다양한 굴곡이 탄탄한 작가의 행보를 거든다. 누굴 만나고, 어떤 상황에 놓이는 것 하나 하나가 작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적극적 삶을 살아가는 조남이 대표의 역할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 존재하고 있다.


촬영을 허락한 작품이다. 작가가 10년을 매달린 작품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평생을 그렸던 모나리자가 떠오른다. 작가와 작품은 <different>가 생명이다.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충분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삶의 변화가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인간의 맘이 순간 순간 변하듯, 삶도 그렇지 않던가. 그게 작품에 나타나 있다. 누구를 만나거나 환경이 바뀌면 작품도 달라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작가는 그렇다. 끝까지 고수하든가 팔색조처럼 변화하던가. 오랜 시간, 작가를 보여주기 위해 고뇌하던 남이 디자인의 고단함도 함께 관람하고 온 거다. 황홀한 색채가 꿈결처럼 아른거린다. 

마리 로랑생전과 남이 디자인. 에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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