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치장한 아프리카의 여인들의 모습에서 천경자 화백을 만난다. 그 곳에서 그녀가 왜 떠오를까? 그녀와 색, 그리고 생각이 닮아서 일지. 지금도 오지라고 생각되는 이곳을 이미 그렸다. 60~70년대의 아프리카에서 그녀의 생각이 머문다. 그녀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나의 여행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그녀와 담소를 나눈다..> 박지연 작가의 짧막한 글이다. 

박지연 작가는 아프리카에서 숨겨진 자신을 보여준다. 소극에서 적극으로, 소심에서 자신감으로, 느림에서 재빨리 먹이를 사냥하는 표범처럼 변한다. <변함>이라기 보단 안에 존재했던 자신을 끄집어 낸 것이다. 표범의 공들인 사냥을 목격하며 프레임 속에 <자신만의 먹잇감>을 찾아 두리번 거린다. 의식은 체험에서 꿈틀거린다. 검은 대륙이 아닌 화려한 그들의 일상을 체험한 것이다. 선입견이 착각이라는 확신과 함께 숨겨 놓았던 자신을 만난다. 여행이 사진찍기와 닮은 건 <자신을 만나는 과정>이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주적주적 비가 내리는 마을 시장에 그녀가 있다. '휙휙' 재빠른 동작으로 사진을 찍는다. 다음 동작을 준비하기 위한 민첩함이 표범같다. 적극적으로 다가가 말걸기, 차 창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 따먹기, 카메라에 어색한 이들에겐 몰카 등 다양한 기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사진 찍기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자 각인하는 작업이다. 적극적인 여행자도 사진 찍기 만큼 그날을 기억할 순 없다. 그것은 그 곳에 자신을 담아 찍기 때문이다. 사진찍기란 공정이 원래 그렇다. 한번이 힘들지 두번은 별거 아니다. 이제 박지연 작가는 이기적인 사진가가 될 것이다.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을 찾아 나설 것이다. 박지연 작가다움을 기대한다. 세상보다 먼저 그 곳에 가 있었던 천경자 화백처럼.

박지연 작가가 아프리카에서 본 천경자 화백의 환영.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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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나 표범은 위험하다. 인간은 동물원에 가두고 본다. 야생성을 잃은 사자는 사자가 아니다. 죽은(死) 자이다. 표범도 그렇다. 세렝게티로 가면 국립공원에서 그들의 야생을 볼 수 있다. 사물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순 없다. 단지 유추할 뿐이다. 동물들의 일상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 스토리를 만들고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거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거다. 세렝게티에서 사자와 표범의 행동을 해석해본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세렝게티 대초원에서 <바라보는>과 <보여주는>의 개념충돌이 일어난다. 바라보는 것이 찍는 것이란 사진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나. 그곳에선 <보여주는>의 의미가 더 커보인다. 보려는 의지가 죄절되고 보여주는대로 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두 개념은 둘다 <보다>를 전제로 한다. 차이는 범위이다. <바라보는>은 자유롭게 무한정 볼 수 있고, <보여주는>은 보여주는 프레임안으로의 <보다>이다. 한정짓는 가운데 그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시간과 장소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그 곳에서 볼 수 있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안내를 받아 사자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사자들이 낮에는 낮잠을 잔다. 경계를 서는 한마리만 빼고 꿈나라다. 경계서는 사자도 가끔 눈동자만 돌리고 있을 뿐이다. 사자는 저녁이 될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곁에 있다. 나무에 올라타기도 하고, 잠을 깨며 딩구는가 하면 다양한 동작으로 카메라의 프레임에 들어오려 안간힘을 쓴다. 해가 기울자 어디론가 떠난다. 일터로 출근하는 거다. 그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배우들의 퇴장과 같다.


반면 표범은 다르다. 표범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들 사이를 빠져 나간다. 총잡이 같다. 잠시후 표범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냥을 한다. 사냥감이 자신의 몸집만하다. 먹고 끌고 가기를 반복한다. 급기야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쉰다. 배부름에 지친거다. 표범은 너무 일찍 사냥을 하는 바람에 클라이막스를 너무 빨리 보여준 거다. 더 이상 관객은 그곳을 지켜보지 않는다. 그를 두고 우리는 그 곳을 떠난다. 공연 중 관객이 자리를 뜨는 격이라. 글로 표현한다면 너무 빨리 결론을 지어 흥미를 잃은 것이다. 

사자는 기승전결을 잘 조율하여 퇴장과 동시에 극이 끝난다. 반면 표범은 너무 일찍 결론을 지어 흐름이 매끄럽지도 않았을 뿐더러 관객의 시선을 끄는데 실패한다. 이 둘의 상황은 우리가 보려는 의지과 상관없이 진행된 것이다. <바라보는>이 아니라 세렝게티의 동물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이란 전제이다.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보여주는>을 통하여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멍하니 지켜본 것이고.

사자와 표범, 그들의 무대는 달랐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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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객관적이다. <타인이 촬영한 나>는 더욱 객관적이다. 기대감에 '힐끔' 들여다보게 된다. 나를 내가 본다는 건 항상 어색하다. 열흘간의 아프리카 여행 중 동료가 찍어준 사진이라 더욱 끌린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시선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의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에 가깝다.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고 싶은 의지일 뿐이다. 함께 했던 동료 이재현 작가가 찍어 준 사진에 내 생각을 살짝 덧붙여 본다.

*사진들은 이렇다. 시장사람들의 사진을 찍으며 여유로운 나. 신발을 수선하는 분의 사진을 찍은후 보여주는 시간. 억수같이 비오는 날 카메라를 몸안에 숨기고 바짝 몸을 움츠린 모습, 대자연과 그 곳에서의 내 모습, 아이들을 촬영하고 작업하며 흐르는 땀을 입고 있던 옷으로 닦던 순간을 찍은 사진, 그리고 아름다운 인도양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나의 모습이 사진에 나온다. 마지막 사진은 춤추는 <즐거운 삶에 대한 로망>의 표현이다.

각각의 사진을 설명하는 건 무의미하다. 여행 중 다양한 모습들을 재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아프리카는 낯선 곳이다. <낯설게 하기>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나에게 '낯섦'은 좋은 먹거리다. 열 장의 사진이다. 웃는 표정과 몰입하는 과정이 전부다. 진지한 세상 바라보기! 찍고 다시 그걸 보고 즐거운 집중의 과정들이 삶과 다르지 않다. 이 사진에서 나의 특징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집중할 땐 미간을 찌푸린다. 또 다른 집중의 표현은 서서 찍을 때 다리를 구부린다는 것이다. 무엇을 떠받을 듯 정중한 자세다. 넓은 풍광을 촬영하는데 조금의 높낮이는 의미가 없다. 집중과 마음의 정돈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 응답의 바디랭귀지이다. 세상을 향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항상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확률은 낮지만 지속적으로 그걸 향해 물음을 던진다. 그게 인생이다.

탄자니아 여행에서 내가 찍힌 사진들, 그리고 그 의미.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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