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과 <훔쳐 본>이란 조합이면 몰카? 내 일상은 내가 아니라 사진이다. 나를 바라본 것이다. 실토하면 홈페이지 디자이너가 내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의 일부이다. 딱 보면 눈에 띄는 사진, 이야기가 있어 보이는 사진, 더러는 타인의 사진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고른 사진이나 찍은 사진이나 그의 성향이 나타난다. '훔치다'란 자극적 언어를 사용했을 뿐 그가 바라보며 골라낸 것이다. 훔치다, 바라보다, 가져오다, 빌리다, 찍다, 쓰다. 단어만 다르지 모두가 창작적 행위이다.

<훔치다> <나를 바라보다> 누군가의 시선은 관심이다. 관심은 심리를 건드린다. 가슴을 술렁이게 한다. 이 사진들을 골라낸, 찍어낸 이는 어떤 사람인가? 이 물음은 그의 관심에 대한 응답이다. 그를 상상한다. 그는 소년의 감흥을 가지고 있다. 막 궁금해 한다. 정적인듯 다양성에 집착한다. 쉽게 질리며 역동적 호기심의 소유자이다. 사진을 보면 막 디자인을 하려 한다. 시도한다. 먼저 던지고 나중에 정리한다. 생각이 날라다닌다. 멈추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저돌적이다. 그는 훌륭한 디자이너이다. 사진을 '훔치다'란 단어를 쓴 이유는 자기주도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목표지향적이다. 완성될 때까지 한다. 지속적이다. 결국 승리한다.

그는 <백만 블로거>의 디지이너이다. 이름은 이우갑이다. 젊다. 판단하고 실행하는 에너지는 강하다. 괜찮은 사람으로의 등극이다. 백승휴가 말하면 그렇게 된다. 나의 홈페이지가 기대된다. 개봉박두다.

내 일상을 훌쳐 본 그는 어떤 사람인가? 디자이너 김우갑!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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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다 <사진, 카피:백승휴. 캘리, 디자인:김정기>

핀 꽃과 지는 꽃. 활짝 핀 꽃을 보고 '화들짝' 하다가 지는 꽃이 못내 아쉽다. 매달린 꽃만 꽃이더냐. 떨어져도 꽃이다. 바닥에 차분히 드러누은 모습도 괜찮. 어디에 있던 꽃이다. 우리는 배운다. 짧게 피고 지는 꽃에서 삶을 배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꽃에게서 모두가 자연임을 확인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꽃은 보여준다. 꽃은 지고 떨어져도 꽃이다. 꽃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피는 것이다. 꽃은 우리가 <바라봄의 시각> 속에서 피고 진다. 어디 꽃 뿐이랴, 세상의 모두는 <존재>의 논리 속에 나타나고 사라지지 않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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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하는 거니? 참말로..." 이런 말은 상대를 무시하는 멘트다. 무시 당한 거 맞다. 장황하게 말을 하는데 두서도 없고 골자도 없다. 내 말이 그럴때가 많다. 할 말이 많아서다. 과연 말을 많이 해야 전부를 말할 수 있을까? <전부를 말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상대가 알아 듣지 못한다는데 있다. 상대도 상대의 프레임으로 그걸 바라보고 들으려 한다. 상대에게 맞는 제안이 필요하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냐고?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바보멸치는 바다보물이란 멸치회사명이다. 대표는 원종찬이다.

멸치 박스 옆에 써진 <바보멸치에서 엄마냄새가 났다.>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은 하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찍기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특히 디자인에서는 더욱 그렇다. 카피가 좋다. 내 생각이다. 나를 추켜세우는 게 아니다. 글자 자체는 더 예술이다. 아이가 땅바닥에 쓴 글처럼 동심어린 글자가 그걸 더욱 강렬하게 감정을 자극한다. 정면이 아니라 기운 대각선 구도와 그래서 남은 부분에 글씨를 앉힌 포석이 예술이다. 

반토막난 피자, 거기에 <색의 유혹>이라 쓴다. 칼라풀한 이미지가 시선을 끌며, 먹는 것을 색으로 유혹한다고 말한다. 미감을 시각으로 변환된 사례이다. 다 보여주지 않아도 좋다. 인간의 눈은 부분의 합으로 전체를 만든다. 반을 잘라내거나 귀퉁이를 오려낸다는 것만으로도 낯설어 진다. 감정은 익숙한 것과 친하다. 잘린 상황은 낯선 것이며 그걸 대신 할 무엇을 찾는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린 부분을 원복하려는 습성 말이다. 끊임없이 부족한 부분을 다른 것으로 메우려 한다. 항상성이다. 

난 음식사진이 좋다. 인물사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각양각색. 모양, 색깔, 질감, 그리고 맛이 존재한다. 얼굴에도 맛은 존재한다. 사람의 향기라고도 한다. 사람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말과 그 말의 톤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음식도 그렇다. 소스나 재료하나 넣거나 뺐을 뿐인데 맛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아챈다. 촉이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예시된 두 작품은 캘리 김정기와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의 협작이다. 전체가 아닌 일부로 상징하고 빈 자리를 채우는 세련미, 이것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이야기로 채워가는 놀이이다.  스토리 텔링의 보고이다.

<선택과 집중>. 비우라, 그 자리를 채울 것이 생겨난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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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빈마마 2018.04.05 04: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이 배우게 되요
    포토테라피
    공부하고 싶습니다.

사진은 객관적 시선이다. 거울과는 또 다르다. 거울은 자신만의 시선이다. 카메라의 시점은 객관성을 부여한다. 타인의 시선이기에 냉정하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며 다양한 생각에 잠긴다. 누구나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에 설렘과 두려움을 갖는다. 일생을 살아도 자신을 모르는 게 <나란 존재>의 매력이다. 나를 계속 찾는 것이다. '찾는다'보다 '헤맨다'가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돈이라고 말한다. 그게 인생이다.

이 사진, 나지만 부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부러운 마음이 들도록 스스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는 것이다. 삶이 그렇듯, 이러지 않으면 내 삶이 허허롭고 상실감이 느껴진다. 한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나의 몸짓은 피사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바로 서야 피사체도 당당해진다.

충청도 음성군이다. "괜찮아유!" "거시기 헌거지유." 내겐 익숙한 말들이다. 말이 아니다. 말투다. 톤이다. 그런 스타일이다. 엑센트에 따라 답이 다르다. 잘 들어야하고 문화를 알아야 알아 들을 수 있다. 처음에 말을 걸면 빈정거리듯 말을 꺼낸다. 친하기의 또 다른 표현이다. 충청도는 은유다. 비유다. 그런 느낌이 때로는 우낀다. 충청도 출신 개그맨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설픈 듯 포즈를 잡고 엉성하게 웃지만 괜찮다. 잘 생겼다. 모델은 자신의 표정을 <비웃음>이란다. 낯섦이자 자신을 낮춰 말하는 것이다. 늘 이런식이다.

사진찍기는 말걸기다. 단도직입적이다.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더 집중하기 위해선 촬영할때 더 몰입해야 합니다. 몰입은 직중 마크이자 괜찮은 답이 나오도록 한다. 나는 <나와 상대>에게  집중하기위해 몰입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세상은 믿은 만큼, 한 만큼 답을 보여준다. 괜찮은 세상이다. 

<프로필 사진> 사진찍기, 내가 몰입하는 이유! #농업기술센터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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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글쓰기란 감정 말하기이다. 이것만 잘해도 <healing> 된다. 글을 쓴다는 건 내면의 응어리를 끄집어 내는 작업이다.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음이 이어진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생각들이 쏟아진다. 감정은 어떤 사진을 보더라도 느낀다. 감정이 없다는 건 단지 느끼고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모든 이이지, 아니 사진에는 느낌이 있다. 이유는 그 이미지가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으로도, 상대와 대화를 나눌때도 딱 좋다. 나와의 대화라면 최고이고.

수업시간 사진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당황하기도 하지만 글을 쓰면서 길이 보인다. 항상 그렇다. 진실은 현장에 가면 있다.

먼저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사진을 보고 떠오른 단어와 이유를 적으라! '위험'과 '위생'을 말한다. 이유는 '철저하다'란다. 짧지만 많은 설명이 담겨있다. 떠오른 단어와 이유에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일단 위험과 위생이란 단어는 다른 의미지만 같은 맥락이다. 그 맥락을 찾아내는데는 '철저하다'가 있다. 위험하기 때문에 철저해야 하고, 위생이 유지되려면 철저해야 한다. 위험은 철저하게 관리해야하고, 위생의 조건으로 철저함을 든다. 둘 다 철저해야 하는 조건을 갖은 단어이다. 아무튼 떠오른 단어 속에는 일상이 아닌 부자연스럽거나 낯선 상황을 접한 의식이 답이 된 것이다. 까다롭게 다가간 단어들은 낯선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사진이지만 두번째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떠오른 감정과 왜 그렇게 느꼈는 스스로 답하게 하는 것이다. '삭막한 도시'라 했고 느낌의 답은 길다. '얼굴이 안보인다. 획일화된 도시의 어느 곳을 현미경으로 들이대고 찍은 듯하다. 우리는 도시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산다. 때로는 남의 일에도 오지랖..' 이라며 말을 흐린다. 뒤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오지랖이란 말속엔 부질없는 행위에 대한 후회가 담긴다. 자신의 일에 몰입 또한 삭막한 도시에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삭막한'이란 느낌을 던지고 그 이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읖조리고 있다. 얼굴이 안보이기에 획일하다. 기계적인, 개성도 없는 비인간적인 공간을 말하며 현미경으로 뒤지는 건 '자세히'란 의미보단 인간적이지 않고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은유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니란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느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유 또한 그렇다. 그러나 입을 떼기 시작하면 그 답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도 사람을 바꿔 '현재 당신의 감정은?'이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감정때문에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묻는 것이다. 답은 '기대... 궁금함'이란 답변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우리는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신에 대해 묻는 것에는 경험해보면 재미난 놀이만 처음인 사람들은 두렵기까지 하다. 기대 또는 궁금이란 말을 쓴 사람은 그나마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미지 한장으로도 그 사람들이 바라본 의미와 이유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다분히 <내 말>이다. 한 장의 사진이 질문에 따라 다른 답을 하고, 보는 이의 현재 감정과 경험을 토대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돌아간다. 얼마나 재미난 수다인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신세계를 접하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한장의 사진! #위험, #위생, #획일화, #오지랖, #철저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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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풍경
제목을 <그냥풍경>이라 정하고 말을 꺼낸다.
'그냥'이란 말보다 <자신감 결여투>가 또 있을까? 
내가 만났던 이 풍경은 그날 그곳에서 내 눈에 들어왔던 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냥이란 말 속에는 남의 눈치보기가 담겨있다. 
아마, 사람들은 이 풍경을 그저그런 걸로 볼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냥을 바꾼다. #땡겼던사진 으로.

<그냥>이라는 말을 하려면 고개를 떨구는 게 맞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면 말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까 눈치를 보는 것이다. 시작 글은 내가 SNS에 올렸던 글과 사진이다. 갑자기 '그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강의시간에 자신의 촬영의도를 물으면 초보자가 자주 쓰는 말이다. 세상에 <그냥>은 없다. 이 말은 상대의 눈치를 보는 자신감 없는 말투이다. 이유없는 무덤없다. 똑같은 말이다. 특히 사진을 찍을 땐 뭔가에 끌려서 셔터를 누른다. 빅데이터처럼 자세히 보면 보인다. 오랫동안 사진과 글,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빠져 있었다. 누구나 찍는 사람들은 소재, 찍는 방법, 색이나 질감 스타일 등 다양한 것들에 의해 자신을 표현한다. 

말을 뱉으면 그렇게 된다. 아니, 그렇게 따르게 된다. 마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것과 동화된다. 말이나 글이나 사진은 하나다. 누군가를 찍을 땐 정성스럽게 찍어야 한다. 사진에 의해 그 사람이 바뀔 수 있다. 마음도 달라진다. 미래도 말이다. 말이나 글 이상으로 사진이란 이미지는 더욱 그렇다. <그냥>이란 영혼없는 말 속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끌리는 사진>으로 말을 바꾸면 사람들이 매력적인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 사진은 그렇다. 

<그냥사진>의 '그냥'을 논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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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분석한다? 분석할 순 있지만 정답은 아니다. 단지 분석할 뿐이다. 지속적 기록을 통하여 집중 분석이 가능하다. 프로이드의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는 20년이 걸렸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가벼움>에 대해 자책 중이다. 단지 몇개월 차이인 사진으로 썰로 풀겠다고 덤벼드는 나의 용기는 가상하다. 프로이드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살았고, 나는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소시민 아니던가? 이런 면죄부, 좋다.

한사람이지만 얼마나 다른지 찾아 보자. 시간차, 장소, 의상, 조명의 모든 것, 포즈, 표정, 목적, 촬영의도, 백그라운드, 상황 등등. 더 자세히 들어가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두 장의 사진이 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사진의 탄생동기와 과정> 때문이다. 우선 사진은 입체를 찍어 평면으로 만든다. 이게 1단계이고, 인식하는 사람이 이걸 다시 입체 즉 그때의 느낌으로 봐줘야 한다. 이건 소통에 관한 문제이다. 세상 모두가 그러하지만 사람의 표정만큼 다양한 것도 없다. 촬영은 보고 느낀 감정과 의도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피사체의 감정이나 촬영자의 느낌이다. 그걸 전달했을때 성공적 소통이라 말할 수 있다. 

두 사진은 정면을 본다. 검정의상은 다소곳한 표정으로 정중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밝은 사진의 표정에서 피사체의 여유롭고 자유로움을 비춰진다. 치아 노출 차이도 있지만 다리가 한쪽 올라가면서 적극적 모습을 띄고 있다. 조각상에서 다리 한쪽이 앞으로 내미는데  역사적으로 2천년이 걸렸다는 말에 비하면 이건 엄청난 변화이다. 검정쪽은 <따르겠다>이고, 흰색쪽은 <같이하자>이다. 갑을관계의 수직구조와 동일선상에 서 있는 구조로 차이를 말할 수 있다. 단지 바디랭귀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되는 느낌을 찰나적 순발력으로 잡아내는 건 사진가의 몫이다. 두 사진은 다른 느낌이지만 사람들은 <아, 보이스 트레이너 박미경>이라고만 말한다.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시선, 그 시선에 따라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이 달라보인다. 제목에 쓰인 <누가 달라진 건가?>의 답은 고민해야할 과제로 남겨두려 한다. 그 사람인지, 나의 시선인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도대체 무슨 말이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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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나 그림이나 똑같다. 결국은 자신을 찍고 그리는 것이다. 카메라의 셀카(셀프 카메라)처럼, 화가들도 자화상을 그린다. 타인이 찍은 나, 사진가인 나도 어색하다. 목소리를 보면 이해가 된다. 자신을 목소리를 듣다보면 아닌 것 같다. 왜 일까? 나를 객관적으로 듣는 것이다. 나에 대해 보거나 든는 건 항상 어색하다.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림은 그린 이의 생각이 개입된다. 누군가의 시선! 설레거나 두렵다. 아들이 바라본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나다. 아들이 그린 두번의 그림을 감상해 본다. 그가 그린 나의 6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그가 본 모습 뿐인지, 아니면 그의 심정의 변화가 표현된 것인가?

2017년 12월 그리다. 고1 아들 백인혁이 그리다. 고뇌하는 사춘기.

2011년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그린 아버지. 유쾌한 시기였다.

2017년 12월 어느날, 아들은 아버지를 두번째 그린다. 첫번째 그림은 갸우뚱 뭔가 진지하거나 코믹한 모습이다. 2017년 현재 아버지는  아직도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중후하다. 재미난 건 아들이 바라본 아버지의 객관적인 모습이라기보단 자신의 심경이 묻어 있다. 초등학생시절에는 그림을 재미나게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자신의 호기심을 아버지의 얼굴에 담는다. 고1 이란 시기는 세상에 대한 반항, 자기 고민 중이다. 초딩시절처럼 재미난 시간은 아니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세상을 향한 샤우팅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림은 자신의 심정을 그린다. 사진은 그런 심경을 세상 속에서 찾아내어 프레임에 넣는다. 극명히 다른 건 그림이란 것이 생각 안에서 찾아 그린다는 것이다. 6년이란 세월의 흔적을 두장의 사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에다 자신의 심경의 변화를 담아서 말해주고 있다. 그걸 읽으면 된다. 이제 부자지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아들 백인혁이 바라본 아버지 백승휴의 성숙도.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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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음성이 분노에 차있다. '인간의 탈', 인간 행세를 하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짓을 한다? 가짜다. 가면무도회. 이름으론 우아하나 서민의 애환을 달래던 방법이다. 가상의 역할을 통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어준다.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이 <할말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욕이라도 한바탕 해대면 후련해 진다. 소심한 사람에게 딱이다. 


'흥, 나 누군지 모를 걸?'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말을 건다. 때로는 목소리도 바꾼다. 영화나 연극에선 <only 바라봄>만 존재하지만 가면놀이는 <함께 하는> 체험이다. 수줍던 몸이 활동을 개시한다. 춤도 춘다. 평소 거울앞에서 혼자 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한다. 가면을 벗자 모두는 놀란다. 가면은 내가 한짓을 아무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가면쓴 모습으로 파티를 한다. 가면무도회다. 자신을 가린 모습이 남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며 즐겁다. 얼굴과 가면(탈)은 다르다. 얼굴은 표정을 통하여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가면은 한가지 모습만 보여준다. 희로애락 애오욕이란 인간의 삶에 대한 도전이다. 한가지 표정만 하고 있다. 얼굴은 불가능하지만 가면은 가능하다. 페르소나, 한동안 이 단어에 꽂힌 적이 있다. 직업으로든 개인으로든 가면놀이는 신선한 체험이다. 가면은 보여주기에 앞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앞서 자신을 바라보며 새 감정을 느낀다. 위안과 과시, 이 둘은 항상 커플처럼 함께 하며 사람들의 일상에 관여한다. 탈, 가면, 페르소나.

이테리 베네치아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교하고 다양한 가면이 볼만한다. 가면에 자신을 묻고 마음껏 속내를 풀어내던 베네치아 사람들. 바다에 세운 도심의 불안한 감정까지도 그들은 가면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가면은 익명의 나다.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다. 어떤 삶이든 살아보고 싶은 욕망 말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롭게 하거든 가면을 써라. 가면의 그를 만나 속삭여 보라. 가면은 삶의 역할교환이란 <different>가 일상에 활력을 준다. 그것은 힐링이다. 가면이란 가상과 자기변화이다. 보여주기와 바라보기를 번갈아 쓰는 양면의 가면이다. 가면을 말하면서 <바라보기와 보여주기>가 둘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보여주기와 바라보기란 양면의 가면, 둘은 하나이다. 

가면, 페르소나,  탈, 연극이란 단어가 떠오를때?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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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과메기 정도는 될 거다. 뭐, 냄새나 보기는 좀 그런거. 이런 별거 아닌 게 먹다보면 중독성이 있다. 음식 뿐이랴. 사람도 생각해보라. 첫인상이 별로인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매운탕을 먹다가 밥위에 익은 무우조각을 올려 놓고 이런 저런 생각에 한컷! 김 한장 값어치는 된다. 먹다보면 밥 한그릇이 뚝딱이다. 

사진은 그렇다. 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이 사진은 어린시절 어머니의 밥상이 떠오른다. 어린시절 좋아했던 음식은 틀림없이 어른이 되면 그리워진다. 인지상정이다. 밀대로 밀어 만든 칼국수, 시쿰한 김치국, 물잠뱅이탕, 가마솥의 볶음밥, 아궁이에서 보글보글 끊어 넘친 두부된장, 투가리가득 넘치게 담은 떡국, 콩자반, 고추장 바른 오징어 무침, 짱아치 등등 시간을 두고 찬찬히 적어 내려가면 백개는 넘을 것이다. 사진 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밥먹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그윽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다. 밥상에 함께 앉은 가족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툭' 찍어 올린 사진이 추억으로의 여행을 시켜주다니, 세상 참 좋다. 

음식을 찍으니 어머니가 떠오른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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