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객관적 시선이다. 거울과는 또 다르다. 거울은 자신만의 시선이다. 카메라의 시점은 객관성을 부여한다. 타인의 시선이기에 냉정하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며 다양한 생각에 잠긴다. 누구나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에 설렘과 두려움을 갖는다. 일생을 살아도 자신을 모르는 게 <나란 존재>의 매력이다. 나를 계속 찾는 것이다. '찾는다'보다 '헤맨다'가 맞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돈이라고 말한다. 그게 인생이다.

이 사진, 나지만 부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부러운 마음이 들도록 스스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다는 것이다. 삶이 그렇듯, 이러지 않으면 내 삶이 허허롭고 상실감이 느껴진다. 한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나의 몸짓은 피사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바로 서야 피사체도 당당해진다.

충청도 음성군이다. "괜찮아유!" "거시기 헌거지유." 내겐 익숙한 말들이다. 말이 아니다. 말투다. 톤이다. 그런 스타일이다. 엑센트에 따라 답이 다르다. 잘 들어야하고 문화를 알아야 알아 들을 수 있다. 처음에 말을 걸면 빈정거리듯 말을 꺼낸다. 친하기의 또 다른 표현이다. 충청도는 은유다. 비유다. 그런 느낌이 때로는 우낀다. 충청도 출신 개그맨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설픈 듯 포즈를 잡고 엉성하게 웃지만 괜찮다. 잘 생겼다. 모델은 자신의 표정을 <비웃음>이란다. 낯섦이자 자신을 낮춰 말하는 것이다. 늘 이런식이다.

사진찍기는 말걸기다. 단도직입적이다. 대답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더 집중하기 위해선 촬영할때 더 몰입해야 합니다. 몰입은 직중 마크이자 괜찮은 답이 나오도록 한다. 나는 <나와 상대>에게  집중하기위해 몰입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세상은 믿은 만큼, 한 만큼 답을 보여준다. 괜찮은 세상이다. 

<프로필 사진> 사진찍기, 내가 몰입하는 이유! #농업기술센터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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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글쓰기란 감정 말하기이다. 이것만 잘해도 <healing> 된다. 글을 쓴다는 건 내면의 응어리를 끄집어 내는 작업이다.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다음이 이어진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생각들이 쏟아진다. 감정은 어떤 사진을 보더라도 느낀다. 감정이 없다는 건 단지 느끼고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모든 이이지, 아니 사진에는 느낌이 있다. 이유는 그 이미지가 다양한 감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수업으로도, 상대와 대화를 나눌때도 딱 좋다. 나와의 대화라면 최고이고.

수업시간 사진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당황하기도 하지만 글을 쓰면서 길이 보인다. 항상 그렇다. 진실은 현장에 가면 있다.

먼저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사진을 보고 떠오른 단어와 이유를 적으라! '위험'과 '위생'을 말한다. 이유는 '철저하다'란다. 짧지만 많은 설명이 담겨있다. 떠오른 단어와 이유에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일단 위험과 위생이란 단어는 다른 의미지만 같은 맥락이다. 그 맥락을 찾아내는데는 '철저하다'가 있다. 위험하기 때문에 철저해야 하고, 위생이 유지되려면 철저해야 한다. 위험은 철저하게 관리해야하고, 위생의 조건으로 철저함을 든다. 둘 다 철저해야 하는 조건을 갖은 단어이다. 아무튼 떠오른 단어 속에는 일상이 아닌 부자연스럽거나 낯선 상황을 접한 의식이 답이 된 것이다. 까다롭게 다가간 단어들은 낯선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사진이지만 두번째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 떠오른 감정과 왜 그렇게 느꼈는 스스로 답하게 하는 것이다. '삭막한 도시'라 했고 느낌의 답은 길다. '얼굴이 안보인다. 획일화된 도시의 어느 곳을 현미경으로 들이대고 찍은 듯하다. 우리는 도시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산다. 때로는 남의 일에도 오지랖..' 이라며 말을 흐린다. 뒤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오지랖이란 말속엔 부질없는 행위에 대한 후회가 담긴다. 자신의 일에 몰입 또한 삭막한 도시에서 기계처럼 살아가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삭막한'이란 느낌을 던지고 그 이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읖조리고 있다. 얼굴이 안보이기에 획일하다. 기계적인, 개성도 없는 비인간적인 공간을 말하며 현미경으로 뒤지는 건 '자세히'란 의미보단 인간적이지 않고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은유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아니란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느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유 또한 그렇다. 그러나 입을 떼기 시작하면 그 답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도 사람을 바꿔 '현재 당신의 감정은?'이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감정때문에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묻는 것이다. 답은 '기대... 궁금함'이란 답변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우리는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신에 대해 묻는 것에는 경험해보면 재미난 놀이만 처음인 사람들은 두렵기까지 하다. 기대 또는 궁금이란 말을 쓴 사람은 그나마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미지 한장으로도 그 사람들이 바라본 의미와 이유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것 또한 다분히 <내 말>이다. 한 장의 사진이 질문에 따라 다른 답을 하고, 보는 이의 현재 감정과 경험을 토대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돌아간다. 얼마나 재미난 수다인가?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신세계를 접하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한장의 사진! #위험, #위생, #획일화, #오지랖, #철저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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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풍경
제목을 <그냥풍경>이라 정하고 말을 꺼낸다.
'그냥'이란 말보다 <자신감 결여투>가 또 있을까? 
내가 만났던 이 풍경은 그날 그곳에서 내 눈에 들어왔던 사진임에 틀림없다.
그냥이란 말 속에는 남의 눈치보기가 담겨있다. 
아마, 사람들은 이 풍경을 그저그런 걸로 볼거라는 생각 말이다. 
그냥을 바꾼다. #땡겼던사진 으로.

<그냥>이라는 말을 하려면 고개를 떨구는 게 맞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면 말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까 눈치를 보는 것이다. 시작 글은 내가 SNS에 올렸던 글과 사진이다. 갑자기 '그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강의시간에 자신의 촬영의도를 물으면 초보자가 자주 쓰는 말이다. 세상에 <그냥>은 없다. 이 말은 상대의 눈치를 보는 자신감 없는 말투이다. 이유없는 무덤없다. 똑같은 말이다. 특히 사진을 찍을 땐 뭔가에 끌려서 셔터를 누른다. 빅데이터처럼 자세히 보면 보인다. 오랫동안 사진과 글,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데 빠져 있었다. 누구나 찍는 사람들은 소재, 찍는 방법, 색이나 질감 스타일 등 다양한 것들에 의해 자신을 표현한다. 

말을 뱉으면 그렇게 된다. 아니, 그렇게 따르게 된다. 마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그것과 동화된다. 말이나 글이나 사진은 하나다. 누군가를 찍을 땐 정성스럽게 찍어야 한다. 사진에 의해 그 사람이 바뀔 수 있다. 마음도 달라진다. 미래도 말이다. 말이나 글 이상으로 사진이란 이미지는 더욱 그렇다. <그냥>이란 영혼없는 말 속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끌리는 사진>으로 말을 바꾸면 사람들이 매력적인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사진을 보고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 사진은 그렇다. 

<그냥사진>의 '그냥'을 논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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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분석한다? 분석할 순 있지만 정답은 아니다. 단지 분석할 뿐이다. 지속적 기록을 통하여 집중 분석이 가능하다. 프로이드의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는 20년이 걸렸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가벼움>에 대해 자책 중이다. 단지 몇개월 차이인 사진으로 썰로 풀겠다고 덤벼드는 나의 용기는 가상하다. 프로이드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살았고, 나는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소시민 아니던가? 이런 면죄부, 좋다.

한사람이지만 얼마나 다른지 찾아 보자. 시간차, 장소, 의상, 조명의 모든 것, 포즈, 표정, 목적, 촬영의도, 백그라운드, 상황 등등. 더 자세히 들어가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두 장의 사진이 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사진의 탄생동기와 과정> 때문이다. 우선 사진은 입체를 찍어 평면으로 만든다. 이게 1단계이고, 인식하는 사람이 이걸 다시 입체 즉 그때의 느낌으로 봐줘야 한다. 이건 소통에 관한 문제이다. 세상 모두가 그러하지만 사람의 표정만큼 다양한 것도 없다. 촬영은 보고 느낀 감정과 의도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피사체의 감정이나 촬영자의 느낌이다. 그걸 전달했을때 성공적 소통이라 말할 수 있다. 

두 사진은 정면을 본다. 검정의상은 다소곳한 표정으로 정중한 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밝은 사진의 표정에서 피사체의 여유롭고 자유로움을 비춰진다. 치아 노출 차이도 있지만 다리가 한쪽 올라가면서 적극적 모습을 띄고 있다. 조각상에서 다리 한쪽이 앞으로 내미는데  역사적으로 2천년이 걸렸다는 말에 비하면 이건 엄청난 변화이다. 검정쪽은 <따르겠다>이고, 흰색쪽은 <같이하자>이다. 갑을관계의 수직구조와 동일선상에 서 있는 구조로 차이를 말할 수 있다. 단지 바디랭귀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되는 느낌을 찰나적 순발력으로 잡아내는 건 사진가의 몫이다. 두 사진은 다른 느낌이지만 사람들은 <아, 보이스 트레이너 박미경>이라고만 말한다. 객관적 시선과 주관적 시선, 그 시선에 따라 사람 뿐 아니라 세상이 달라보인다. 제목에 쓰인 <누가 달라진 건가?>의 답은 고민해야할 과제로 남겨두려 한다. 그 사람인지, 나의 시선인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도대체 무슨 말이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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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나 그림이나 똑같다. 결국은 자신을 찍고 그리는 것이다. 카메라의 셀카(셀프 카메라)처럼, 화가들도 자화상을 그린다. 타인이 찍은 나, 사진가인 나도 어색하다. 목소리를 보면 이해가 된다. 자신을 목소리를 듣다보면 아닌 것 같다. 왜 일까? 나를 객관적으로 듣는 것이다. 나에 대해 보거나 든는 건 항상 어색하다. 조물주가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림은 그린 이의 생각이 개입된다. 누군가의 시선! 설레거나 두렵다. 아들이 바라본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나다. 아들이 그린 두번의 그림을 감상해 본다. 그가 그린 나의 6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그가 본 모습 뿐인지, 아니면 그의 심정의 변화가 표현된 것인가?

2017년 12월 그리다. 고1 아들 백인혁이 그리다. 고뇌하는 사춘기.

2011년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그린 아버지. 유쾌한 시기였다.

2017년 12월 어느날, 아들은 아버지를 두번째 그린다. 첫번째 그림은 갸우뚱 뭔가 진지하거나 코믹한 모습이다. 2017년 현재 아버지는  아직도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중후하다. 재미난 건 아들이 바라본 아버지의 객관적인 모습이라기보단 자신의 심경이 묻어 있다. 초등학생시절에는 그림을 재미나게 그리고 호기심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자신의 호기심을 아버지의 얼굴에 담는다. 고1 이란 시기는 세상에 대한 반항, 자기 고민 중이다. 초딩시절처럼 재미난 시간은 아니다. 때론 분노하고 때론 세상을 향한 샤우팅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림은 자신의 심정을 그린다. 사진은 그런 심경을 세상 속에서 찾아내어 프레임에 넣는다. 극명히 다른 건 그림이란 것이 생각 안에서 찾아 그린다는 것이다. 6년이란 세월의 흔적을 두장의 사진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에다 자신의 심경의 변화를 담아서 말해주고 있다. 그걸 읽으면 된다. 이제 부자지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아들 백인혁이 바라본 아버지 백승휴의 성숙도.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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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음성이 분노에 차있다. '인간의 탈', 인간 행세를 하며 인간이 할 수 없는 짓을 한다? 가짜다. 가면무도회. 이름으론 우아하나 서민의 애환을 달래던 방법이다. 가상의 역할을 통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어준다.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이 <할말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욕이라도 한바탕 해대면 후련해 진다. 소심한 사람에게 딱이다. 


'흥, 나 누군지 모를 걸?'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말을 건다. 때로는 목소리도 바꾼다. 영화나 연극에선 <only 바라봄>만 존재하지만 가면놀이는 <함께 하는> 체험이다. 수줍던 몸이 활동을 개시한다. 춤도 춘다. 평소 거울앞에서 혼자 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한다. 가면을 벗자 모두는 놀란다. 가면은 내가 한짓을 아무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가면쓴 모습으로 파티를 한다. 가면무도회다. 자신을 가린 모습이 남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며 즐겁다. 얼굴과 가면(탈)은 다르다. 얼굴은 표정을 통하여 다양한 감정을 표출한다. 가면은 한가지 모습만 보여준다. 희로애락 애오욕이란 인간의 삶에 대한 도전이다. 한가지 표정만 하고 있다. 얼굴은 불가능하지만 가면은 가능하다. 페르소나, 한동안 이 단어에 꽂힌 적이 있다. 직업으로든 개인으로든 가면놀이는 신선한 체험이다. 가면은 보여주기에 앞서 바라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앞서 자신을 바라보며 새 감정을 느낀다. 위안과 과시, 이 둘은 항상 커플처럼 함께 하며 사람들의 일상에 관여한다. 탈, 가면, 페르소나.

이테리 베네치아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교하고 다양한 가면이 볼만한다. 가면에 자신을 묻고 마음껏 속내를 풀어내던 베네치아 사람들. 바다에 세운 도심의 불안한 감정까지도 그들은 가면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가면은 익명의 나다.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다. 어떤 삶이든 살아보고 싶은 욕망 말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롭게 하거든 가면을 써라. 가면의 그를 만나 속삭여 보라. 가면은 삶의 역할교환이란 <different>가 일상에 활력을 준다. 그것은 힐링이다. 가면이란 가상과 자기변화이다. 보여주기와 바라보기를 번갈아 쓰는 양면의 가면이다. 가면을 말하면서 <바라보기와 보여주기>가 둘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보여주기와 바라보기란 양면의 가면, 둘은 하나이다. 

가면, 페르소나,  탈, 연극이란 단어가 떠오를때?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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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과메기 정도는 될 거다. 뭐, 냄새나 보기는 좀 그런거. 이런 별거 아닌 게 먹다보면 중독성이 있다. 음식 뿐이랴. 사람도 생각해보라. 첫인상이 별로인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매운탕을 먹다가 밥위에 익은 무우조각을 올려 놓고 이런 저런 생각에 한컷! 김 한장 값어치는 된다. 먹다보면 밥 한그릇이 뚝딱이다. 

사진은 그렇다. 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이 사진은 어린시절 어머니의 밥상이 떠오른다. 어린시절 좋아했던 음식은 틀림없이 어른이 되면 그리워진다. 인지상정이다. 밀대로 밀어 만든 칼국수, 시쿰한 김치국, 물잠뱅이탕, 가마솥의 볶음밥, 아궁이에서 보글보글 끊어 넘친 두부된장, 투가리가득 넘치게 담은 떡국, 콩자반, 고추장 바른 오징어 무침, 짱아치 등등 시간을 두고 찬찬히 적어 내려가면 백개는 넘을 것이다. 사진 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밥먹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그윽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다. 밥상에 함께 앉은 가족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툭' 찍어 올린 사진이 추억으로의 여행을 시켜주다니, 세상 참 좋다. 

음식을 찍으니 어머니가 떠오른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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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바로 판단된다. 절차는 있지만 인식하지 못한다. 할 수도 없지만 필요도 없다. 시간차가 있다. '자 봤으니 맛을 느끼거나 감정을 느껴봐.'로 인식한다면 삶이 복잡해진다. 승질 급한 사람은 일상이 짜증난다. 인식구조가 알아서 척척해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미지를 딱 보면 알아서 처리한다. 음식을 보면 예측한다. 경험이나 성향에 따라서 다르지만 상상한다. 이것은 마케팅이나 디자인에 활용된다. 쇼윈도우의 이미지가 호객행위를 시작한다. 두가지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끌리는 이미지와 안 끌리는 이미지!

어찌 겉절이가 김장김치의 품격을 따를 수 있겠는가? 겉절이가 애드립이라면 김장김치는 정통이다. 삶도 그렇지만, 두 음식 모두 중요하다. 붉은 색은 입맛을 돋군다. 김장 김치의 채도를 약간 높여 눈길을 끌게 한다. 동치미도 붉은 빛이다. 이건 무우가 붉은 색이자 우러난 것이다.  

괜찮은 풍경이나 사람을 보면 사진을 찍는다. 찍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찍는다. 음식은 먹고 싶어진다. <싶어지는>는 조건부이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가 끼어든다. 이미지를 보고 판단한다. 이미지가 주는 의미는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감정을 만들어 낸다. 하고 싶은 감정 말이다. 눈은 감정이나 경험에 의하여 이미지를 스스로 포장하지만 사진은 객관적이다. 냉정하다. 작가의 손질이 필요하다. 보고 느낀 감정대로 사진을 만들어야 한다. 같이 오는 듯하지만 본 다음에 감정을 느낀다. 음식의 보는 것과 찍는 것은 다르다. 자, 이 음식은 어떤가? 밥한공기 뚝딱? 연미향 강은미 대표의 음식이다. 맛의 달인, 페북에 올라오는 그녀의 음식은 항상 먹고 싶게 한다. <맛의 달인>에다가 <이미지의 달인> 하나 더 추가다.

이미지는 끌림이다. 음식은 먹고 싶어진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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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때가 있다. 인물사진을 찍을때 특히 그렇다. 때로는 카메라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도 인다. 원하는 컷도 안 나오고, 피사체와의 호흡도 맞지 않을 때 그렇다. 방법은 인내와 기다림이다. 한참을 공 들여야 한다. 카메라를 들고 웃고 있는 나는 웃는 게 아니다. 인내의 주리를 틀어야 한다. 주리를 트는 방법은 그때 그때 다르다. 나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서 막 나온다. 누군가 찍힌 그때 사진을 보고서야 알 수 있다. 


이기적인 나. 내가 일에 열중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몰입의 즐거움에 빠지려는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몰입 만이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 인물사진이든 풍경이든 렌즈는 표준 이하 걸로 쓴다. 가까이 다가가서 찍기 위해서다. 말걸기, 얼르기, 협박하기, 타협하기 등 다양한 수법을 통해 소통한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들어간 사진의 대부분은 동료들이 찍어준 거다. 이재현 작가의  작품이 많다. 그는 찰나를 잡아내는 달인이다. 정겨운 느낌이 좋다. 몰입적 행위는 상대를 리드할 수 있는 좋은 바디랭귀지이다. '나는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장풍을 날리는 듯한 장면도 상대에 대한 주문보다 나 자신에 대한 정신집중 작업이다. 사진 찍기는 이 정도다. 쉽지 않지만 그만큼 재밌다. 

이기적 사진가 백승휴의 사진 찍는 동안은?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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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나 표범은 위험하다. 인간은 동물원에 가두고 본다. 야생성을 잃은 사자는 사자가 아니다. 죽은(死) 자이다. 표범도 그렇다. 세렝게티로 가면 국립공원에서 그들의 야생을 볼 수 있다. 사물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순 없다. 단지 유추할 뿐이다. 동물들의 일상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 스토리를 만들고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거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을 해석하는 거다. 세렝게티에서 사자와 표범의 행동을 해석해본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세렝게티 대초원에서 <바라보는>과 <보여주는>의 개념충돌이 일어난다. 바라보는 것이 찍는 것이란 사진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나. 그곳에선 <보여주는>의 의미가 더 커보인다. 보려는 의지가 죄절되고 보여주는대로 봐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두 개념은 둘다 <보다>를 전제로 한다. 차이는 범위이다. <바라보는>은 자유롭게 무한정 볼 수 있고, <보여주는>은 보여주는 프레임안으로의 <보다>이다. 한정짓는 가운데 그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시간과 장소를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그 시간, 그 곳에서 볼 수 있다. 단순한 차이 같지만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안내를 받아 사자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사자들이 낮에는 낮잠을 잔다. 경계를 서는 한마리만 빼고 꿈나라다. 경계서는 사자도 가끔 눈동자만 돌리고 있을 뿐이다. 사자는 저녁이 될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곁에 있다. 나무에 올라타기도 하고, 잠을 깨며 딩구는가 하면 다양한 동작으로 카메라의 프레임에 들어오려 안간힘을 쓴다. 해가 기울자 어디론가 떠난다. 일터로 출근하는 거다. 그 모습은 마치 무대에서 배우들의 퇴장과 같다.


반면 표범은 다르다. 표범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량들 사이를 빠져 나간다. 총잡이 같다. 잠시후 표범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냥을 한다. 사냥감이 자신의 몸집만하다. 먹고 끌고 가기를 반복한다. 급기야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쉰다. 배부름에 지친거다. 표범은 너무 일찍 사냥을 하는 바람에 클라이막스를 너무 빨리 보여준 거다. 더 이상 관객은 그곳을 지켜보지 않는다. 그를 두고 우리는 그 곳을 떠난다. 공연 중 관객이 자리를 뜨는 격이라. 글로 표현한다면 너무 빨리 결론을 지어 흥미를 잃은 것이다. 

사자는 기승전결을 잘 조율하여 퇴장과 동시에 극이 끝난다. 반면 표범은 너무 일찍 결론을 지어 흐름이 매끄럽지도 않았을 뿐더러 관객의 시선을 끄는데 실패한다. 이 둘의 상황은 우리가 보려는 의지과 상관없이 진행된 것이다. <바라보는>이 아니라 세렝게티의 동물들은 우리에게 <보여주는>이란 전제이다.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보여주는>을 통하여 그들의 일상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멍하니 지켜본 것이고.

사자와 표범, 그들의 무대는 달랐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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