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은 설렘반 부담반이다. 교육담당자들의 새로운 과정의 런칭도 그렇다. 새가슴이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확신도 강의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당락을 거듭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촉이 있는 담당자들은 과감하게 저지른다. 이번 강의제안이 그렇다. 커뮤니케이션 강사들은 많다. 그러나 식상하다. 한 얘기 또 하는 느낌, 그래서 사진이라는 컨텐츠를 활용하는 나의 강의를 요청한 것이다. 나의 대답은 '잘 했다'이다.

이번 포토테라피 강의는 기존에 '커뮤니케이션 강의'을 대체하여 편성한 것이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고 같은 마음일 수는 없다. 새로운 환경, 아니 세상이 그렇게 급변한다. 새로운 동료들과의 관계는 두려움이 아니라 '알아가는 재미'로 바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나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더욱 서로를 힘들게 해왔다. 의식이란 체험을 통하여 변화된다. 감동적인 글귀나 명언이 아니라 서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의식이 스스로 바뀐다. 이 강의가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제목을 어마무시하게 달았다. 사진의 조건, 커뮤니케이션의 완성! 누구나 잘 안다는 사진의 새로운 사실들로 강의는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나와 남은 다르다. 다른 환경, 다른 성향! 무조건 다를 수 밖에 없다. 아니, 같은 사람이 없다. 비슷한 사람도 없다. 무조건 다른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모두가 행복해진다. 문제의 발단은 자기의 생각에 세상을 덫씌웠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어깨동무. 이런 세상이 올까? 모두가 행복한 세상! 오지 않는다. 희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과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산다. 이런 결과를 향해서 과정이 필요하고, 그러기위해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 결국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과정은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 산다, 자식을 위해 산다? 결국은 나다.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 논리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솔직해 지자. 어짜피 인간은 이기주이자니깐. 이것까지도 인정하면 이야기는 끝난다.
 
*강의는 커뮤니케니션에 집중한다. 명명하지 않는다. 참여 속에서 그것을 터득해 간다. 체험은 직접 경험을 말한다. 나 자신이 그 안에서 감각한다. 다른 방식에 의하여 체험하는 것이다. 사진은 '한정된'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로 불리운다. 그러나 시각을 우선으로 하는 체험이 피부로 체감하는 시점까지 인도하게 된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 들이는 모습을 접하게 되는 순간까지를.
 
부부이야기를 하자. 한 부부는 자신들의 딸을 각자 찍었다. 주제를 던져주고 찍었지만 너무 다른 시선으로 사진이 찍혔다. 물론 설명은 더욱 더 빗나갔다. 서로는 놀랐다. 30년이상된 부부가 그것도 자신들의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부터 달랐음을 인정해야 했다. 부부도 그런데 하물며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그들은 더욱 다른 것이다.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한다. 나 자신을 인식하게 하고,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게도 만들어 준다. 사진이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를 되뇌이게 한다. 몇시간만에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긍정으로 바뀐다. 그래야 자신이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의는 마무리되어간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바꾼다. 맞다. 인간이 카메라을 만들었지만 카메라가 찍어낸 사진이 사람을 바꾼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꿔 놓는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 사진이라는 익숙한 도구를 활용하여 사람들은 웃을 수 있다. 장담한다. 이것이 나의 강의의 매력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완성, 현대해상 강의를 즈음하여.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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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아이가 손가락을 빤다. 놀고 있는 것이다. 손에 닿는 것을 만지작 거린다. 소통을 제안하는 것이다. 손은 탄생과 더불어 표정보다도 먼저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노인이 된 손은 나이를 말해주며 지나온 자신을 삶을 말해준다. 손이 은연중에 말하는 언어는 진솔함이 담겨있다. 이처럼 소통을 위한 언어는 다양한 방법에 의하여 이뤄진다. 얼굴을 비롯하여 몸 전체가 언어적 도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얼굴 표정 다음으로 제일 많이 활용되는 것이 손이다. 여자들에게 손은 여성성을 부각하곤 한다. 손톱에 색칠을 하고, 길게 기르거나,  그리고 손가락에 반지와 손목의 팔지나 시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지위나 부를 상징하며 과시하곤 한다. 손등의 주름은 나이를 상징하고, 잘 관리된 상태는 그 사람의 상황과 성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얼굴은 표정까지도 방어하려하지만 손은 은연 중에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위 사진의 '마주 잡은 손'은 은폐된 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마주 잡은 손'의 공통점은 어색함에 있다. 손을 잡는 행위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손의 주인공은 부자, 모녀지간 그리고 형제와 자매끼리 마주잡은 손이다. 어떤 손도 자연스럽지 않다. 둘다 어색한가 하면 한쪽에서 적극적로로 잡으려고 해도 한쪽에서는 거부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거부상태는 아니다. 얼굴로 말하자면 수줍은 표정이다. 이 손들은 진지하게 눈빛을 마주하며 다정한 대화조차도 나누지 않았을 정도다. 주먹을 불끈쥐면 분노나 각오를 나타내고, 손을 펴고 흔들면 만남과 헤어짐을 의미하며, 주먹을 진 상태에서 어떤 손가락을 펴느냐에 따라서 믿음이나 욕같은 다양한 의사소통의 도구로 활용한다. 음식을 먹거나 글을 쓸때도 활용되는 이 손은 얼굴 이상으로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를 가진 부분임에 틀림없다. 

물론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발생하지만, 그 차이에 의하여 의사소통에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표정보다도 손 모양에 따라서 지역마다의 소통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수하는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통 도구이다. 손에는 지문이 있어 그 사람을 확인하기도 한다. 손에 대한 의미를 찾아내자면 몇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손만으로도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서로를 대하는 손 모양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으니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손은 다양한 언어적 도구이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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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요양원 안보내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청담성담의 시니어 아카데미의 사진강좌를 시작한다. 요양원은 노인이 건강이 안좋아지면 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곳이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가게 된다. 가지 않는 방법은 건강하게 사는 것 뿐이다. 건강은 많이 움직이고 즐겁게 생활하면 대부분 해결된다. 그럼 사진으로 그게 가능할까? 이런 질문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러나 노년은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시기인지라 다운된 분위기가 자주 찾아온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움직이고 즐거운 마음갖음에 있다. 그럼, 사진으로 그것이 왜 가능한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김 수자 작.

장미꽃은 집 주변에서도 천지다. 노인들이 자주 찍는 게 예쁘다며 꽃을 많이 찍는다. 나는 강력하게 추천금지다. 그건 집앞에서 쉽게 찍는 것이기에 그렇다. 운동이 안된다.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안된다. 이런 꽃은 '예쁘다.'라고 탄성 한번이면 끝이다. 깊이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는다. 집 주변에서 찍으려면 낯설게 찍기를 해야 한다. 동네 풍경, 길가의 들풀, 흔들리는 나뭇가지, 건물의 그림자, 바닥에 질감등 다양한 것들에 감정이입을 통하여 사유의 시간을 가지면 가까운 곳에서도 좋다. 이유는 우뇌의 활성화 작업이기에 그렇다. 

노인들은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는다는 목표가 정해지면 하루에도 몇시간씩을 돌아댕겨도 지치지 않는다. 사진은 몸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열정으로 찍기 때문이다. 온 몸이 종합병원이던 노인도 움직이며 생각하는 사진찍기를 일정기간하게 되면 건강해진다. 눈빛이 달라진다. 사진으로 타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노인에게 대화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혼자만의 시간보내기는 관계로의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노인에게 상실감은 많은 이유에서 경험하게 된다. 상실감은 일단 극복하게 되면 점차적으로 많은 것들이 좋아진다.

진달래 꽃이다. 사진의 배경으로 보면 야산이다. 어렵지만 산을 타는 것이다. 이런 멋진 역광사진은 때와 장소를 골라야 한다. 시간을 맞워야 하고 장소에서도 빛의 방향을 찾으려면 쉽지 않다. 사진찍기의 매력은 산책이나 등산처럼 목적이 단순히 목적지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진찍기는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칠 줄 모르고 소재를 찾아해맨다. 이런 방식의 사진찍기는 남녀노소할 거 없이 열정적으로 변한다. 몰입의 경지에 빠져들면서 엔돌핀이 생성되면서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한번 맛을 보면 지속적으로 사진찍기를 하게 된다. 먹이를 찾아 해매는 하이에나처럼 저돌적이면서도 그 장면을 만나기 위해 사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인에게 사유의 과정은 우뇌를 자극하게 된다. 좌뇌적 삶을 살아왔던 노인들에게 우뇌적 삶은 좌뇌와 우뇌를 골고루 활용하게 되면서 치매예방을 할 수 있다. 치매가 이제는 과학의 발달로 디지털이 극성을 부리면서 나이에 관계없이 찾아온다고 한다. 

목적을 있어야 삶이 생동감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몸으로 직접 움직여야 한다. 나의 수강생중에는 과제를 위해 일주일에 5일을 하루종일 사진 찍기를 하는 76세의 노인이 있었다.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사진찍기가 주는 움직임과 사유의 시간이 그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물론 산으로 들로 가지 않아도 된다. 동네어귀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재미가 쏠쏠하며 사진을 찍을 소재들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도 운동과 사유의 장이 완벽하게 펼쳐지는 셈이다. 


'노인 요양원 안보내기 프로젝트', 청담성담 시니어 아카데미 강좌.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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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은 일부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누굴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전부를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사람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을 안다고 하지만 전부를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바라보도록 조정하는 것 중에 하나가 빛이다. 사진에게 빛은 생명이다. 비단 빛이 사진에게만 그럴까, 세상 자체가 빛이 없으면 '무' 인 것을. 보고만 있었던 빛을 이해하려니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걸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렇게 이해하면 쉽다. 노래 가사에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단 낫다는 말이 있다. 거리감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도 가까이 지내야 친근하다. 빛도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빛은 부드럽고, 같은 조건에서 멀어지면 딱딱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광의 대부분은 태양광이다. 이 태양광은 직사광과 확산광으로 크게 나뉜다. 맑은 날과 구름낀 날의 빛의 질감이 다르다. soft & hard. 맑은 날 태양은 실제 거리, 먼거리에서 피사체를 비추고, 구름낀 날의 광원은 지구를 덮고 있는 구름 그 자체이다. 거리상으로 구름과 태양은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가까운 구름은 부드러우며, 맑은 날 태양은 딱딱하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어김없이 맞아 떨어진다. 거리감이란 자연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이유는 사람이 자연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빛이나 광학이 어렵게 다가오거든 자연 스럽게 일상에서 비유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광질은 인간의 정감과도 같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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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나를 꿈틀거리게 한다. 강의장에 들어서면 그때마다 느껴지는 각각의 공기가 그렇고, 그런 과정과 그 결과들에 의해서도 그렇게 만든다. 계획된 진행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에 의해서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의 빈구석을 채워가는 과정이 강의를 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아이에게 뒷춤에 숨겨놓고 시선을 끌고 있는 것처럼, 나의 뒷춤에는 항상 사진이 있다. 그것으로 나는 뭐든 시작한다. 시작, 과정, 결과 등 모두가 사진으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뭐든 잘하고 싶어한다. 사진찍기는 더 그렇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 그 도구를 잘 활용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배운다. 그런데 이제 사진 찍기는 기계적인 사용 방법만이 아니다. 생각의 생성과 그로 인한 대중과의 공감이 더 큰 과제가 되었다. 이게 시대의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단순하지만 강의장에서 즉흥적으로 쓰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몸짓을 자유롭게 찍어 놓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 사진은 6명의 포즈를 통하여 그의 성향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의 콤플렉스의 원인과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통하여 그와 대화를 시작한다. 동료들의 이야기만으로도 강의장은 후끈 달아 오른다. 사진이 스토리텔링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과정이다.

사진을 찍히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행동이나 자기 표현이 무자연스러운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발설하는 것이다.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행동들은 오랜 시간동안 그 사람의 인상을 만들고, 그 인상은 그의 인생을 결정짓기도 한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사진을 보면 그의 현재가 보인다. 그 사진에는 그의 성향이 가감없이 담기고, 그런 습관에 의해서 현재가 완성된 것이며, 대부분 적중하게 된다. 

인간에게 계기란, 특히 습관을 바꾸는 계기란 철저한 계획에 의해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30대 중반에 들었던 강의에서 내 삶이 송두리채 바뀐 것을 생각하면 내 강의가 그들에게 어떤 미래를 제시할 수 있을지 책임이 막중해진다. 어떤 아름다움도 나의 부재 속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나와 너가 있을 때 무엇이든 존재하게 된다. 그 중에 제일은 나 자신이다. 수 많은 강의장으 궁극적인 목표는 나를 만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강남구 점프홍보단 강좌. 사진 잘 찍기의 의미.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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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맞다. 소설의 제목이다. 소설가 김영하작가가 쓴 거구. 그의 재미난 뻥처럼, 한 사진가가 시도한 수작이다. 물론 그 작가만큼은 못하다. 나는 사진을 앞에 두고 글을 쓰면 술술 풀리는데 글만 쓰라면 벽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글쓰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언어 구사력에 존경을 표한다. 요즘 나에게 다가온 사라짐에 대한 화두, 그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감동적인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뻥도 자꾸쳐야 느는 것이니깐. 

이미지는 특이하다. 안 끼는데가 없다. 말을 하면 뇌는 이미지로 인식한다. 부인해도 맞다. 가만히 느껴보라.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면 머리 속에서는 이미지로 떠오를테니깐.

2015년 겨울 동해는 가뭄이었다. 두번째 내린 눈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여행에서 맞이한 상황은 횡재처럼 느껴졌다. 일상에 눈이 덮이고, 습관적으로 남자는 눈을 치우고 있었다. 농부의 삽질처럼 뭔가를 해야 마음이 편하다. 허락을 맞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물론 내가 다른 풍경에 심취해 있는 동안 집으로 들어갔던지, 이웃집으로 놀러갔던지, 아무튼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사라진 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를 집요하게 논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그 자리에 존재하는 무엇에 대한 것이다.

그 남자는 사진 찍은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사라졌다고 sns에 적었더니만,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나게 나타났다. '이 분이 어디 가신거에요?'라고 심각하게 실종신고라고 해야할 듯 나에게 물었다. 또한, '그냥 있구먼' 이란 답글을 남기기도 했다. 사라짐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뭐라 단정지을 수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은폐가 신비로움처럼 수 많은 추측이 난무하게 된다. 훌륭한 예술가들은 역사적으로 많다. 그러나 다빈치처럼 많은 담론이 쏟아진 적도 없었다. 물론 그 내용들은 글쓴이의 추측과 확신일 뿐이지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그럴 것이다, 그런 것처럼 보인다.'이다.

당신은 '사라진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모자 사이로 흰머리와 거친 피부가 고단한 삶을 살아 왔음을 증명한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산골의 평온하지만 녹록하지 않은 삶이 있고, 다랭이 논을 지으며 근근히 살아온 그의 성실함과 사회,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지 않았던 의지가 남아 있다. 눈을 치우다만 그는 다른 곳에 시선을 멈추고 있다. 그가 바라봤던 시선도 그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시선이 나의 마음을 울쩍하게 하는 것은 객지로 나간 자식들의 소식이 그립고, 현재의 그는 고독하다. 인간의 삶이 그렇듯이, 마냥 좋을 수만도 없는 일상 속에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노하우란 견디는 것이다. 

당신은 그가 사라진 지금, 그곳에 무슨 흔적이 당신의 시선을 끌고 있는가?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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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변신하는 3가지 조건이 있다. 화장빨, 조명빨, 뽀샵빨이다. '발'이라고 하지 않고 '빨'이라고 한다. 이유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다가오게 하기위한 나만의 방식이다. 특히 여자에게 그렇다. 여자에게 화장한 자신은 그냥 나다. 도리어 화장을 안 한 내가 낯설다. 조명빨은 나이트클럽의 현란한 빛을 말하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석양에서의 여자는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빛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문명의 발달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만들었다. 뽀샵빨은 그 원형을 심하게 훼손한다. 물론 우리은 성형수술을 탓하지만 그보다도 더 만능으로 사람을 바꿔 놓는다. '이럴 수 없어'를 되뇌일 정도로 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 이런 3가지에 의하여 사람을 바꿔 놓은 예를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물론 포토샵은 극히 일부인 사진인데도 두 이미지는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당신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가?

양 영지 작.

사람은 누구나 비대칭이다. 그런데 그게 더 매력적이다. 여자를 바꿀 수 있는 것 중에 화장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얼굴 부위만을 말하지 않고 코디네이션 전반적인 것을 포함한다. 의상, 헤어, 그리고 얼굴을 말한다. '옷이 날개'란 말은 여기에서도 해당된다. 볼에 점하나 찍었을 뿐인데, 헤어를 살짝 묶어 올렸을 뿐인데도 이렇게 다르다. 카메라의 높이와 화각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럼 같은 얼굴이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경우의 수 또한 수만가지는 될 거다. 인물사진은 다양성의 도전이다. 또한 이런 것들이 인물사진의 매력이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양영지씨다. 자신이 모델을 고르고, 자신이 메이크업을 하고, 그리고 찍었다. 전시라는 것은 남들에게 보이고 공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전시에 걸린 작품을 포장지에서 뜯어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콘셉트의 극대화를 통한 양면성 표현.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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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볼 관, 마음 심으로 구성된다. 두 글자를 합하여 해석하면 '마음을 보다'와 '마음으로 보다'로 나뉜다. 일단 사전적 의미는 뒤로하고, 액면 나타난 것에서 시작한다. 이외에 바라보다의 정의에 (그냥) 바라보다라는 문제아가 나온다. 그럼 차근 차근 덤벼볼까나...

세상은 사물들의 아우성으로 항상 시끄럽다. 작렬하는 태양과 맞서 분수대의 물소리와 자태가 심상찮다. 음악에 맞춰 춤이라도 추는 듯, 리듬감이 프레임 속에 담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던 성철스님의 말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로를 말하려는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이곳은 이테리의 밀라노, 말이 통하지 않아 그들의 아우성을 알아 먹을 수가 없었다.

먼저 기타부터 말하자면, (그냥) 바라보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바라보는 것은 다양한 종류가 있겠지만 '그냥'이란 목적성이 없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때는 바야흐로 나의 대학시절 강의장으로 간다. 나는 전자공학과를 들어갔다. 물론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공수업 3시간은 (그냥)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수업시간의 칠판은 녹색이며, 글자는 흰색, 그리고 설명하는 교수는 그냥 사람일 뿐 어떤 의미도 나에게는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인내를 배웠다. 그리고 최고의 고문 중에 '벽 봐!'가 있다. 아무런 문양도 없는 벽을 본다는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인간의 머릿속에 무로 채워 넣는다. 아마 일주일이면 충분히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권태를 조장한다. 쇼펜 하우어가 말했던 '삶은 고통'이라는 전제에 속한다. 권태는 일상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아닌 매일 보는 뻔한,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이보다 더 고통스런 삶이 어디 있겠는가? '바라보는'이란 행위 앞에 그냥이란 무의미함은 인간성을 말살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보란 말인가?

여기에 '관심'이란 단어를 먼저 제시한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마음으로 바라보느냐, 마음을 바라보느냐의 선택적 기로에 선다. 우선 마음을 바라본다라는 말은 영험한 분께서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열길 물속보다 더 어려운 한길 사람의 마음을 어찌 영험하다는 수식어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마음을 바라보는 것에는 서로에게 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어찌 상대의 마음을 읽겠는가. 바로 이런 대답이 나온다. '너나 잘해라!'. 그렇다면 바라보다의 의미에서 가장 하일라이트는 마음으로 바라보다이다. 방법이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하는 것이자,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라봄에 대한 조건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라봄, 이것은 항상 '마음으로'라는 전제 조건을 갖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바라보다라는 말에는 그냥도 아닌, 마음을 바라보는 것도 아닌 주체자가 내가 되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바라보기가 되는 것이다. 눈은 바라보지만 카메라는 찍어낸다. 마음으로 찍어내는 것이야 말로 마음을 담은 멋진 작품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관심, 바라봄에 정의가 필요하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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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건강식품 이전에 우리의 삶이다.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가족이 모여 김치를 담근다. 담근다는 말 속에 담아두는 숙성을 의미가 담겨있다. 숙성없는 김치는 그냥 배추이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김치를 먹지만 단순하게 먹어 치우는 음식으로 치부하기에는 아깝다. 김치라는 음식, 즉 사물을 통하여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은 묘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보는 순간 그곳으로 간다. 특히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바로 그곳으로 가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고흐의 구두에서 농부의 고단함과 농촌 아낙의 힘겨움을 극복해주는 과정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나에게 김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있다. 4남매를 키우며 힘겹게 살아야 했던 어머니의 삶이 드러난다. 

김치는 주부에게 찬거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김치찌게, 김치 볶음과 다양한 음식에 첨가되어 손 쉽게 음식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김치는 배추로 만들어진다. 한 여름 뜨거운 태양아래서 들판에서 노동을 서슴치 않아야 했던 고단한 삶이며, 가을이면 추수해야 한다.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장은 수순처럼 다가온다. 김치는 도시락을 상징하며, 학창시절의 점심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김치는 화기애애한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이며, 가족이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일터로 찬을 내 가던 아낙으로의 어머니와 안주로 곁들이는 한 모금의 술잔을 마시는 농부로의 아내의 숨결이 느껴진다. 디자인된 접시에 올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고향의 질박한 그릇 속에 자연미가 살아 나온다.  김치는 어머니의 정성, 가족의 친화, 현대인의 건강, 그리고 어린시절을 떠올리는 사물로 다양한 존재를 드러낸다. 깔끔한 접시에 놓여 은폐되었던 모습이 사유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 치맛 속의 하얀 피부를 드러낸 듯 접시위에 누운 김치가 배시시 웃고 있다. 김치는 나에게 일상이며 요즘 삶의 전부다.


김치, 음식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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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타고, 어느 카페에서, 영화 시간을 기다리며,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뭘 떠올릴까? 나는 글을 쓰기 위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잘 써서도 아니고, 그것이 목적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을 떠올리기 위한 나의 생각의 시도이다. 때로는 독서로,  때로는 사람들과의 수다에서도 생각은 생성된다. 생각은 다양하지만 하찮은 생각까지도 꼬리를 물면서 언젠가는 으젖한 생각이 나온다. 생각은 매력적이다.

1년만에 은평구청 강좌의 요청을 받았다. 1년도 넘게 지난 기억들이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록 새록 떠올랐다. 수업은 친근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나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수업 시간 중간에 밖으로 나가 촬영한 스마트폰 이미지가 수업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사진이 스토리텔링의 도구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즐거운 시간이었다.  

눈 위에 발자국, 검정색과 흰색이었으며 사람과 동물의 흔적이 보였다. 이분법적으로 결정지어지는 방식에 의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발표자의 시작은 이랬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 중에는 '뽀드득'이라는 소리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 의미는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눈이란 것은 치우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같은 강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뽀드득'이란 소리에 어린 시절을 떠올렸으며, 사람들은 과거로 회기하고 있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가 생각난다, 눈사람을 만드는 자신이 떠오르며, 세배하러 가는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각들이 눈으로 인하여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수업시간은 화기애애하게 몇십분의 지속되고 있었다.

다양한 사진들이 발표되었지만, 이런 건 뻔한 사진으로 치부될 수 있다. 이건 차의 백미러의 불빛이었다. 그러나 발표자는 그런 뻔한  대답 대신 그만의 의미를 말했다. 자신은 이 사진이 붉은 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좌측에 반사된 하얀색 질감에 의미부여하고 있었다. 그 흰색이 나머지 붉은 색을 더욱 붉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것은 대비를 통하여 상대의 의미를 더욱 극대화시킨다고 말했다. 상대를 부각, 배려를 의미하고 있었다. 영향력, 긍정과 부정이 존재한다. 이 사진에 담긴 작가의 의미는 서로에게 긍정적 존재로의 의미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미러처럼 둥글고 여유로웠으며 그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의 인상은 푸근하며 모두를 안아줄 그럴 사람이었다. 사진은 그를 말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나는 수업 중에 이 사진들을 보여줬다. 1년전 눈내린 날 그곳에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블루의 하늘, 갑작스럽게 내린 눈에 당황한 파, 자연과 어우러진 사물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낸 것은 동료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사진이었다. 역시 사람에게 최고의 관심사는 사람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사진,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까? 단지 1년이란 세월의 척도로만 의미할 지...

1년만에 만난 그들, 대부분 그대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4번의 강의에서 첫째를 마무리를 지었다. 좀처럼 움직임이 없던 그들이었지만 서서히 수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진이 그 사람을 담고 있음을, 자신의 카메라가 단순한 찍힘이 아니라 자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의미없는 농담에도 서로에게 위안일 수 있듯, 사진 속에 담긴 말들로 수다를 떠는 그들을 그려본다. 아직은 이르다.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그러나 그들은 4번의 강의 후에는 사진 속에 담긴 서로를 이야기하며 멋진 수다를 떨 것이다. 사진은 서로를 어루 만지며 서로를 치유한다. 정말이다.


은평구청 사진 교육 1. 자연이 말을 걸다.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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