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이란 단어가 나에게 익숙하게 된 지는 얼마 안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찾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작권이란 창작자의 정신적 권리라고 나는 정의한다. 나는 나의 창작적 모든 권리를 저작권과 연관시키곤 한다. 이기적 발상이기는 하지만. 물론 글을 비롯한 창작자의 행위의 산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더 구체적이고도 법적인 논리에 대해서는 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연구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시우대표 촬영.

강원대학교 비교법학 연구소와 사)한국저작권법학회의 주관으로 강원대학교에서 열렸다. 저작권법에 관심있는 사람들, 법을 업으로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있는 사람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의지는 회장인 전문영변호사에 의해서 실행되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 창작자인 나도 참여하여 토론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나는 법적 용어를 원할하게 구사하면서 그들의 논리에 대응하지는 못했지만 교과서 미분배보상금에 대한 활용방안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흥미로운 것을 그들의 대화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가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사뭇 분위기가 그곳과는 달랐다. '건조한'이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법의 논리라는 것은 감정이 섞여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그 감정을 배제한 논리적 지배영역에 있는 분들이어서 그런지 왠지 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분위기에 있는 나 또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으나 왠지 썩소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식사를 하다가 전문영회장과 나눈 이야기속에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법이라는 것이 공감하는 방법이 이미지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 나는 아주 재미난 생각에 빠져 들었다. 이미지와 텍스트, 여기에서 텍스트는 법의 논리이고 이미지는 사진을 가지고 풀어대는 썰과도 비유된다. 사진 한장을 가지고 각자가 느낀 점을 말하는 수업에서 그 누구도 그 사람의 생각에 테클을 걸지 않는다. 그것을 풀어내는 적당한 논리는 있겠지만 주관적 시선을 인정하는 화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풀어내는 내용에서의 차이도 분명 있겠지만 주관적인 감성을 포함시키는 것이야말로 공격의 대상이 된다. 나는 세미나에게 진행자와 발표자가 말하는 내용속에서 정해진 틀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의미에서 사진의 프레임과도 같다는 생각도 했다. 판사앞에서 변호사의 변론 또한 놓여있는 논리들을 재구성하면서 설득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변론인은 품크툼을 주장하나 판사의 판단은 스투디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법의 건조함은 그 표피가 건조해 보일 따름이지 그것을 구성하는 창작적 언어구사라는 새로운 프레임구성에는 사진찍기의 프레임과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강단에서나 블로그에 샤우팅하는 무책임한 발언들이나 법적 근거를 재시하면서 '그만의 논리'를 설득력있게 구성하는 발언자의 마음에는 창작적 행위로 가득하다라는 것이다. 물론 '그만의 논리'란 논리의 객관을 담보하면서 주관적 재구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상과 융합적 논리로 비유해본 계기로 나에게 즐거움을 줬다. 그러나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토론문화에서 '건조한'이라는 논리적 이유로 표정까지 건조한 것은 피해야 될 듯싶다. 얼굴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는 단서이기에 더욱 그렇다.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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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2013.10.06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분야는 연관된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비춰질 뿐이지 하는 일들은 같다.
    단순하게 말하면, 하루 세끼를 먹고, 그것을 위해 일터로 나간다. 가끔 가족을 포함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들어준다.
    그 관심은 관계를 통하여 이뤄진다. 그런 것들이 사람이 살아가는 공통적인 행위양식이다.

    익숙하게 쓰는 단어가 다르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그들끼리의 소통을 즐긴다. 아니 즐긴다기보다도 당연히 필요한
    절차이다. 그것에 의하여 그들만의 장을 만들고 타영역의 사람들에게 담장을 만든다. 아이들이 소꼽장난을 하면서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처럼 그렇다. 삼삼오오 짝을 짓는 것도 더 많은 사람들보다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혜택을
    누리고 싶어한다. 직업이든 여타의 영역도 다 그렇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다. 이것이 무너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수 있다는 바램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