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이런 물음에는 철학자들도 멍때렸을 것이다. 난 누구냐면 백승휴고, 왜 사냐면 태어나서 사는 것이지 딱 떨어지게 그 말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가식스럽기 그지없다. 나의 존재를 말하고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인지는 안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묻는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어쩐지 멍한 기분일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위대한 철학자들도 자신을 전부 안 것도 아닐 것인데, 많은 논리만 퍼부어 놓고 먼저 떠나 버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가 무엇일까? 명강사, 백승휴가 있어서일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으나, 정답이 아닌듯하다. 강좌가 있으니 왔고, 친구가 가니깐 따라온 사람도 있다. 세상 사는게 그런거다. 이런 곳에선 자기 목숨걸고 배우지 않는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몽둥이 맞으며 숙제 검사하고 지각하면 욕먹던 과거의 그 교실이 아니다. 그러나 왜 그들의 눈빛이 더 반짝이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아마 배움의 의도자가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충 확신한다.

이 곳이 화기애애하다는 것은 빨간 내복같은 것을 입은 사람의 표정이 말해준다. 즐겁자고 배우는 것이기에 강의도 즐거워야 한다. 남의 표정을 밝게 하려면 강단에 서있는 사람의 표정이 먼저 밝아야 한다. 수업시간에 강의를 듣던 학생이 몰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의 표정은 다양하다. 한번도 똑같은 표정은 없었다. 이것은 타인이 찍은 사진에서만 접할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느닷없이 찍어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사진의 묘미이자 장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도 이런 찰나는 잡아내지 못한다. 후기 인상파 화가의 빠른 손놀림으로도 불가능하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 그날의 감흥이 떠 올라 가슴 설렌다.



카메라와 사진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칸트와 헤겔을 이야기한 것은 실행력때문이다. 생각을 실전에 옮기는 것보다 중요한게 없기때문이다. 이 비유는 두명의 수영코치로 시작했다. 칸트라는 수영코치는 이론으로 실전 가능한 것들을 미리 가르치고 현장에 내보낸다. 그러나 헤겔이라는 코치는 일단 물속에 집어 넣는다. 바로 살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그 과정에서 수영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더욱 멋지게 수영을 하고 싶다면 스스로가 훌륭한 코치를 찾아가게 한다는 논리다. 이건 전적으로 나의 강의기법이다. 그래야 창의적인 사진찍기를 할 수 있다. 아니 사진으로 삶을 즐길 수 있다. 창의적이란 뚯은 그 방법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를 샘플로 쓴다. 다른 사람을 쓰는 것은 뒷담화에 불과하다. 너무 간접적이다. 실존적 검증을 해야 학생들의 눈빛이 또렷해진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다. 내 몸으로 때우며 강의를 한다. 바로 눈앞에 보여야 비교하고 인정하고 그래야 이해한다. 읽던 세상에서 보는 세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시각적 자료를 활용하는 것이고, 내가 사진가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기존에 배웠던 사진들에서는 메카니즘을 논했고, 그것으로 진도를 끝내면 강의는 끝났다. 그러나 나의 강의에는 종강이 없다. 자신과의 싸움이며, 결론이 없는 진행형이다. 인생이 그렇듯이 죽음 말고는 끝이 없다. 고로 나의 강의는 끝이 없다. 


중년의 사진찍는 삶은 아름답다.(성북구청강의)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Posted by 포토테라피스트 백승휴 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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